아, 그래도 지리산에 다녀온 기억은 남겨놓아야 할 것 같다
기록해두지 않으면 하루하루 지날수록 하나씩 까먹을거다.
10:30분 전에는 컴퓨터 끄는 걸 목표로 하고 start,
육체적으로 내 생애 가장 힘든 기억이다.
아, '가장'이라는 표현을 쓰려니
끔찍하게 아팠던, 그러나 자거나 쉴 수 없고 참아야했던 몇 번의 기억과
술 마신 다음날이라던지 -_- 의 것들이 생각나서 어쩐지 마음이 약해지지만
뭐 그냥 그렇다 치자.
첫 날 세석산장까지 가는 길은 정말 자살충동이 느껴질 정도 ㅋ
자존감이 낮아진다고 하였지만 엄마가 그건 자존심이라고 정정 해 주었고
새삼 나의 오만함을 생각하였다.
나는 가장 맏이이니, 내가 가서 미리 준비를 해 두어야 한다는 책임감과
잘해서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다.
속으로 나는 이렇게 힘든데 이렇게 많이 참고 있다구 나는 정말 힘들어
언니는 참 괴로운거야 라고 생각하였지만
생각해보면 엄마는 엄마이기 때문에,
박혜준은 우리중 유일하게 이전에 지리산 종주 경험이 있기 때문에,
박우진은 가장 젊고, 게다가 남자이기 때문에
느끼는 부담이 있었겠다 생각하니 미안했고 안쓰러웠다.
각자 마음 속에 '나는 ㅇㅇ하니 잘해내야겠다' 부담감을 안고,
각자의 지친 육신을 얼마나 끌고 끌었을까.
나의 지난 몇몇 활동들을 떠올려보면
해병대 캠프도, 제주도 일주도, 신문 배달도
아직 이루지 못했지만 꿈꾸고 시도했던 노가다 ㅋ 도 그렇고
모두 육체적으로 좀 고단한 것들이고
나는 그런식의 육체적인 고통으로 정신력을 검증(?)받는 형태의 활동을
잘 해내는 타입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오만이었고 이번이 진짜라고 생각하는 건
이제껏의 것들은 몇 번이고 시뮬레이션 해 보면서 내가 할 수 있겠다 싶은 것들을 골라서
도전인 척 했던 선택적 활동이었고
이번 것은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그냥 끌려온 ㅋ 진짜 도전이기 때문이다.
나무 냄새와 흙냄새가 좋다.
서울 시내의 가로수는 누군가의 구토가 묻어있는 나무일 것 같아 찝찌름할 때가 있는데
산에있는 나무는 마음껏 만졌다.
나무를 만지면 손에 남는 고동색 찌꺼기가 좋고 고동색 찌꺼기에서 좋은 냄새가 난다.
향기라는 표현을 쓰기엔 너무 자연스럽고 예쁜 냄새.
가장 걷기 편한 길은 젖은 낙엽길 > 약간 진흙길 > 흙길 이었고
물기 많은 진흙은 정말 부드럽고 편안하고 찌겅, 하는 느낌이 나는데
좋다고 여기면서 철벅철벅 걷지 못하는 내가 서울 사람 같아 슬펐고
바위길이 가장 힘들었다.
올라가는 길은 몸이 힘들고, 내려가는 길은 마음이 힘들다.
같은 신을 신고 어떨 땐 올라가는 길이 더 가파른데도 나는 내려가는 길을 무서워한다.
내가 넘어지면 어떤 꼴로 구를 지 상상이 되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이유는 잘 모르겠어, 생각이 마음을 두렵게 하는 것 같아 슬펐다.
나무와 가지와 난간이 내 친구.
바람이 불면 나무잎에 서로 닿아 내는 소리가 들린다.
정말 아름답다.
구름이 내 옆에, 혹은 내 아래에 있었고 그건 아주 황홀한 광경이었지만
다시 올라가고 싶은 생각은 없고, 달력에서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기로 하였다.
나는 나무를 좋아하지만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 것 같고
가끔 산이 생각날 것도 같지만 동산정도가 적당할 것 같다.
내 속도대로 가면 어떨까 혼자였으면 나았을까 하다가
그랬으면 종주는 힘들었을 것도 같고 아직 결론을 내지 못했다.
꽃길 같은 곳도 많고, 정말 내 생에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아름다운 장면이 많았다.
처음 몇시간은 내가 등산초보여서 더 좋은 것도 많이 보고 기쁨도 많이 느낀다 생각하였고
'초심'에 관하여 생각하였다.
몸이 힘들어지자 눈 앞이 까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초심에 대해 생각한 부분은 나쁘지 않았어.
금요일 오후 백무동에 도착하니(=하산하니) 바로 아스팔트가 나와 낯설고 아쉬웠다.
생각해보니 3일을 나무와 흙만 보았는데 이건 정말 특별하고 보석같은 경험이고 기억이다.
많은 생각이 있었는데 그 외에 것은 지금은 생각나지 않아 아쉽지만,
잊었다는 건 그만큼 강렬하지 않았다는 거겠지요 안녕 지리산.
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