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호목사님과 박총님의 글, 그리고 고영근님의 중재글
표현 방식에 따라, 각자의 기준에 따라 서로의 글이 어느 때는 상처일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그냥 제 3자의 무책임한 감정일 수 있단 생각이 들어 마음 한켠이 무겁기도 하지만,
나는 동일한 하나님의 뜻을 각자의 관점을 갖고 다양한 언어로 풀어내는 이런 장면이 좀,
짜릿하다.
각자 처한 위치에 따라 누구는 김동호 목사님의 자선이,
누구는 박총님의(우리 기부자님 *-_-* ♡) 연대가
가난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자애로움을 이해하는 더 쉬운 개념일 수 있어서 그렇다.
김동호목사님
1.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 일어 난 일을 재판 한다고 할 때 공정한 재판관이라면 무조건 옳고 그름만을 가지고 판결하지는 않을겁니다.
2.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라고하는 불공정한 구조를 감안하고 공정한 핸디캡을 적용하려고 할 겁니다.
3. 중학생과 대학생과 운동시합을 하는데 그냥 나오는 점수대로 판단을 한다면 그것을 공정한 심판이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4. 그러나 그런 차이가 있다고해서 나름 공정한 핸디캡을 적용하는 선을 넘어서 무조건 중학생이 이겼다라고 할 수 도 없는 것입니다.
5.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에는 분명 불공정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을 감안하지 않아도 억울함이 발생하고, 감안 정도가 아니라 그 불공정한 차이 때문에 무조건 가난한 사람이 옳고 부자는 틀렸다라고 판단하고 결정한다면 그 또한 공정한 판단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6. 바둑을 둘 때 고수와 하수가 함께 둘 때가 있습니다. 보통의 경우 자기 급수를 고려해 몇 점을 접어 줍니다. 핸디캡을 적용해 주는 겁니다. 그 핸디캡 적용이 적당하다면 고수와 하수가 바둑을 두어도 늘 고수만 이기지는 못합니다.
7. 핸디캡을 적게 잡아서 하수가 밤낮 지는 바둑을 두어서도 안 되고, 핸디캡을 너무 많이 잡아서 고수가 밤낮 지는 바둑을 두어서도 안됩니다. 그러면 바둑이 재미 없어 집니다.
8.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9. 세상에는 부자의 핸디캡을 적용하지 않아 언제나 가난한 사람이 지는 게임이 많이 일어납니다.
10.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이 바로 그런 게임에서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일 것입니다.
11. 정당한 핸디캡을 잡아 주어서 가난한 사람도 이길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경기를 통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실력이 늘어나 서로 간의 핸디캡을 점점 줄여가야만 합니다.
12.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이 지나쳐도 안 됩니다. 다시 말해 가난한 사람의 핸디캡을 너무 무리하게 잡아주어서 언제나 가난한 사람이 정의가 되고 이기는 세상을 만들어서도 안 됩니다.
13. 그렇게 하면 가난한 사람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가난한 사람의 진정한 실력이 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냥 강자가 약자가 되고, 약자가 강자되고, 약자가 된 강자가 다시 강자가 되고, 강자가 된 약자가 다시 약자가 되는 되풀이가 반복될 것입니다.
14. 하나님은 소자 한 사람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과 같다고 말씀하시리만큼 가난하고 소외된 소자에게 관심이 많으십니다.
15. 하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한과 억울함에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저들의 한과 억울함을 풀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6.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지나치시지 않으십니다.그러하신 하나님께서 어제 말씀드린 레위기 말씀에서 그렇다고해서 무조건 가난한 자의 편을 들면 안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것 입니다.
17. 세상에는 가난한 자와 소외 된 자들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뜻밖에 많이 있습니다.저들의 수고와 헌신과 희생 때문에 그래도 어느 정도 세상의 소자들의 억울함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18. 그러나 아무리 옳은 일도 지나치면 문제가 생깁니다. 그것이 지나쳐 무조건 가난한 자의 편에 서게 되면 안 됩니다.
19. 그러면 더 복잡하고 힘든 문제가 생겨나게 됩니다. 문제를 해결한다고 나서다가 더 크고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20. 내일 한 번 더 써야 할 것 같습니다.
21. 단순한 머리로 복잡한 하나님의 정의를 생각하려니 쥐가 납니다.
22. 이 글 때문에 생길 수도 있는 논쟁을 미리 생각하니 벌써부터 골치가 아프기도 합니다.
23. 그래도 하나님의 정의에 대하여 고민해 보고 있다는 자체가 저는 좋습니다.
24. 그래서 벌써부터 머리에 쥐나고, 벌써부터 골치가 아픔에도 불구하고 굿모닝입니다.
박총님
큰 사랑과 존경을 받는 목사님께서 레위기를 인용하며 가난한 자에 대한 책임과 배려를 다하되 무조건 가난한 자의 편을 들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 일하다가 자기 의에 빠짐을 경계하자는 말씀도 새겨들어야 할 지적입니다. 그러나 뭔지 모를 아쉬움이 느껴져서 뱀발을 달아봅니다.
1.
잘잘못과 시비를 가리는 점에서는 빈부에 따른 편벽됨이 없이 공의를 우선해야 하겠지만, 성경은 명백히 가난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편애(God’s preferential love for the poor)를 믿습니다.
2.
반면 부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대부분 경고와 심판입니다. 심지어 주님은 부자가 천국에 가기가 어렵다는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잠언은 아예 “부자가 되려고 애쓰지 말고, 그런 생각을 끊어 버릴 슬기를 가져라“(23:4)고 못 박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들 대부분은 이들 말씀을 너무나 안일하게 받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시쳇말로 ‘생까는’ 거지요. 저는 목회자들이 이런 말씀을 강단에서 제대로 선포하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3.
“예수에 대한 우리의 충성, 그분의 가르침을 존중하는 마음이 우리의 소비습관을 바꿀 정도로 강력한가? 아니면 소비습관은 이제 너무나 ‘성스러워져서’ 함부로 바꿀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는가?” (짐 월리스, 『가치란 무엇인가』 , ivp)
4.
참 무서운 지적 아닙니까? 물신숭배와 소비사회에 대한 이런 통찰 없이 ‘청부론’을 말하는 것은 얼마나 순진하며 또 위험한 일입니까?
우리는 주님이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하며 맘몬을 하나님의 라이벌 신(a rival god)으로까지 언급한 까닭을 숙고해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5.
간혹 구령의 열정에 사로잡힌 용감한 목회자가 21세기에도 여전히 복음을 전하다 죽는 순교자가 우리 가운데 나와야 한다며 사자후를 토하긴 하지만, "덜 벌고 덜 쓰라"며 복음의 정신에 가장 정직한 설교를 하는 목회자가 별로 없다는 것이 우리 시대의 아픔입니다.
(실제로 덜 벌어 덜 쓰면 우리를 괴롭히는 많은 문제에서 의외로 쉽게 벗어날 수 있습니다. 부와 명예에 대한 탐욕을 버리면 철야기도에 나와 눈물 흘릴 일도 확연히 줄어듭니다.)
6.
과거 노예무역 시대에 흑인과 백인이 한 형제자매 되어 함께 예배할 수 있다고 말하면 미친 놈 취급을 받았듯이 오늘날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게 죄일 수 있다고 하면 미친 놈 취급을 받습니다.
하지만 영국 리버풀의 성공회 주교 제임스 존스는 과거 한 때 교회가 노예 제도를 용인하고 지지한 것을 부끄러워하듯이 머잖은 훗날 교회가 성도들을 무비판적인 소비자로 살아가도록 방치하고 부추긴 것을 참회하게 될 거라고 했습니다.
그날에 부끄럽지 않은 저와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7.
다시 가난한 자에 대한 주님의 편애로 돌아와 봅시다. 가난한 자들을 먼저 생각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 유명한 메시아 사명 선언문(Messianic mission statement, 눅 4:18-19)에도 명백히 드러납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8.
예언자 이사야와 그 말을 인용한 주님에 의하면, 성령이 임한 것은 다름 아닌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구절을 받잡고 성령의 기름부음을 간구하지만 정작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은 간 곳이 없습니다.
어쩌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 간구가 이뤄지지 않는 건 아닌지 돌아볼 일입니다.
9.
이를 한 번 더 확인해주는 강력한 일화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굳게 믿었던 세례 요한조차 감옥에 갇혀 죽을 날이 다가오자 예수가 정말 그들이 기다리던 ‘그 분’인지 새삼 확인하고 싶어졌습니다.
세례 요한이 보낸 제자에게 예수님은 Yes/No로 답하는 대신 요한에게 이렇게 일러주라 합니다. 이보다 더 정확한 답변이 없기 때문입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5).
10.
다시 가난한 자입니다. 다시 가난한 자들에 대한 우선적인 관심과 사랑입니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그것을 바로 메시아로서의 정체성과 결부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 하는 질문에 “저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라는 말로 답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11.
주님이 이렇게 가난한 자들을 먼저 생각하신다면 그분의 자녀이자 친구인 우리들 역시 가난한 자의 편에 서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바울을 통해 이에 대한 분명한 요청을 받았습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신약성경 로마서 12장 16절).
12.
‘낮은 데 처하며’는 NIV 영어성경이 잘 옮겼듯이 “천한 자들과 연합하라”(associate with the humble)는 뜻입니다.
현대어성경은 노골적으로 “상류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려 하지 말고 보통 사람들과 즐겁게 사귀십시오.”라고 옮깁니다.
저는 종종 “주류 사회에 들어가려고 애쓰지 말고 사회적 약자들과 즐거이 연대하라”고 번역하곤 합니다.
신분 상승에 대한 노력을 접고, 대신 사회적 약자들의 편에 서는 것! 이것이야말로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13.
가난한 자들과의 이러한 연대가 없다면 우리의 예배, 봉사, 선교도 공허한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성문 밖에 현존하시는 그분에게로 나아갈 때에, 우리가 임시 체류자로 살아갈 때에, 우리가 정의로운 삶을 살고 우리의 소유를 궁핍한 자들과 나누어가질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께 찬양의 제사를 드릴 수 있다. 예배, 복음전도, 봉사가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가지려면, 모든 것들은 “밖에서” 십자가에서 처형된 예수와 버림받은 자들에 대한 그의 영원한 사랑과의 연대 속에서 행해져야 한다” (O. E. 코스타스 저, 김승환 역, 『성문 밖의 그리스도; 제 3세계의 선교신학』, 한국신학연구소, 1987년, ‘하느님’이란 말 땜에 저자를 가톨릭이나 소위 ‘자유주의자’로 볼 수도 있겠지만, 코스타스는 르네 빠디야, 로날드 사이더와 궤를 같이 하는 복음주의자임을 밝혀둡니다).
14.
아직도 예배, 전도, 봉사만 열심히 하면 장땡인 줄 아는 교회가 너무 많습니다. 예배 세미나는 각처에서 성황이고, 허다한 이들이 예배학을 공부합니다. 교회마다 더 은혜로운 예배를 위해 고민합니다. 서점에 가보면 ‘예배’라는 말이 제목에 들어간 책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젊은 시절 저의 신학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코스타스는 가장 낮은 이들과의 사귐이 없다면 예배, 전도, 봉사 같은 종교적 열심에 의미를 부여받을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교회는 이 사실을 잔인할 정도로 철저히 간과하고 있습니다.
15.
저의 예배가 가장 살아 있던 것은, 과거 서울 구로동에서 벗님들과 연립주택 지하에 교회를 개척, 가난한 한부모 가정 청소년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놀고 공부하고 예배하던 때였습니다. 그 시절만큼 예배, 전도, 봉사가 자랑스러운 때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연대가 없어서일까요, 예배를 하면 할수록 저는 목이 마릅니다.
16.
좀 멀리 왔네요.
처음 논의로 돌아가서 법 앞에 부자와 빈자가 공의롭게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자 양심 있는 모든 자의 믿음이지만, 현실을 보면 법은 결코 평등하지 않습니다.
법 적용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법률 자체부터가 기득권층의 이익이나 통치자의 편리를 위한 것이 많습니다.
17.
목사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레위기 말씀을 통해) '가난한 자에 편에 서서 사는 삶'과 '가난한 자의 편을 드는 것'에 대한 예리한 구별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 둘을 동일시합니다. 거기서부터 사회의 혼란과 갈등이 시작된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18.
거기서 시작되는 혼란과 갈등도 없진 않겠지만, 상위 1%의 탐욕과 전횡에 의한 혼란과 갈등은 이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목사님의 글에 원론적으로는 동감하면서도 어딘가 불편하게 느끼는 것은 바로 이런 점에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19.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까지 반대하는 특별 사면을 기어코 강행한 이명박 정권과, 불산이 누출되면 즉시 신고해야 하는 법을 보란 듯 무시한 채 사람이 죽었는데도 25시간이나 숨기고 언론을 통제한 삼성을 보며, 이 땅의 불의한 현실을 오늘 아침에 새삼 확인합니다.
20.
모든 걸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이 없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저는 ‘굿모닝’에 화답할 수가 없습니다.
이내 마음은 그저 하염없이 분하고 아프기만 합니다.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지 않고, 이 의분과 슬픔의 힘을 옮겨서 연대(solidarity)라는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한 방울이라도 더 붓겠습니다.
21.
비록 개인적으로는 우울증에 걸리면서 하나님에 대한 섭섭함이 많이 쌓였습니다만, 가난한 자들에 대한 편애와 사회적 약자들과의 연대를 말씀하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 받으소서.
덧니,
1. 약자들과의 연대에 동참하기 위해, 한창 창립 준비 중인 협동조합 '작은연대'를 고려해보시면 좋겠습니다 :D
2. 이 글에서 펼친 제 논지의 대부분은 졸저 『욕쟁이 예수』와 꽃피는 3월에 나올 새 책(포이에마 근간)에 포함된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 긴 글을 순식간에 써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
3. 제가 저번에 이어 이번에도 김동호 목사님 글에 반론을 써서 괜히 안티로 자리매김 하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는데, 그 분에 대한 애정은 변함 없습니다. 전병욱이나 오정현 목사에게는 이런 글 쓰지 않습니다 :D
고영근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편애'에 관해 김동호 목사님이 쓰신 3편의 칼럼과 박총 님의 반론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이에 대해 성승현 님이 제 의견을 요청(?)하여서 제 생각을 간단하게 말하려 합니다. 저는 먼저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고 이를 위해 힘써 일하시는 김동호 목사님도 존경스럽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았고 또 앞으로도 함께 연대하려고 하는 박총 님도 존경스럽습니다. 그래서 저는 두 분 다 좋아합니다. 사실 저는 두 분처럼 그렇게 살지 못하고 말만 하는 것 같아서 부끄럽습니다. 저는 한 때 김동호 목사님을 공격하는 글을 많이 쓰기도 했는데, 이제는 김동호 목사님을 인정하고 존중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저는 두 분 모두 뛰어난 글쟁이들이라서 그런 점에서도 둘 다 좋아합니다.
제게는 김동호 목사님의 글이 노골적으로 부자를 편들자는 말로 해석되지 않습니다. 김동호 목사님의 글은 가난한 자라고 해서 무조건 편드는 것은 정의가 아니고, 그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도 좋지 않다는 의도로 읽힙니다. 그리고 박총 님의 글도 노골적으로 가난한 자를 편들자는 것으로 해석되지 않습니다. 박총 님의 글은 우리가 가난한 자와 더 연대해야한다는 의도로 읽힙니다. 제가 두 분의 글을 잘못 해석한 건가요? ^^;
미국의 성경해석학자인 케빈 J. 밴후저는 성경 말씀 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글을 읽을 때 신뢰와 사랑을 가지고 읽으라고 말합니다. 영국의 성경해석학자인 앤서니 티슬턴은 경청하면서 읽으라고 말합니다. 누군가의 글을 읽기도 전에 먼저 의심하고 불신하고 증오하면서 읽으면 아무런 의미와 유익을 얻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글을 쓴 사람이 독자를 속이거나 이용하기 위해 악의적인 의도를 가지고 쓴 경우라면 정당한 의구심을 가지고 검증할 필요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과 글을 먼저 경청하고 존중하고 신뢰하고 사랑해야만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결혼을 한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가장 가까운 부부사이라도 서로 불신하거나 미워하거나 화가 나 있는 상태에서는 각자의 의도와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하면서 의사소통하기가 어렵습니다. 반면 결혼 전에 뜨겁게 사랑할 때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얼굴만 보면 사랑하는 사람의 생각을 훤히 읽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김동호 목사님과 박총 님이 가난한 자나 부자에게 악의를 가지고 나쁜 의도로 말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두 분의 글에서는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자비'와 '연대'라는 따뜻한 마음이 읽힙니다.
이제 두 분의 글에 대한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생각은 "(가난한 자와 부자 모두에 대한) 하나님의 보편애와 역사의 사닥다리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편애는 둘 다 유지되어야 한다. 전자나 후자 중 어느 하나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기독교의 메시지를 불구로 만드는 것이다."라는 구스따보 구띠에레스의 말과 같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은 아래에 인용한 '희년의 경제학' 내용과 거의 동일하게 때문에 그 글을 그대로 인용해서 올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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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난한 사람이라고 모두 포함되는 것도 아니고, 부자라고 모두 제외되는 것도 아니다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자들은 특히 출애굽기와 누가복음에 의거해서,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은 사회의 밑바닥 인생이라고 주저 없이 지적했다. 역전-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을 재배치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된 소식이다! 그러나 누가 가난한 사람인가? 왜 하나님은 그들을 편애하시는가? 이것은 교회와 관련해서 또 교회와 국가의 관계와 관련해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미 언급했듯이 하나님께서는 정의와 자비를 사랑하신다. 이것은 그분이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모세를 부르실 때 분명히 드러난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데려가려 하노라."(출3:7-8) 하나님의 자비는 사람들이 억압을 볼 때 느끼는 '연민의 감정'을 넘어선다는 것에 주목하라. 그분은 히브리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모세를 보내시고, 온 국민을 위해서 행동하셨다.
왜 성경에 가난한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편향(divine bias)'이 들어있다고 말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대항하시고 또 어떤 사람을 위해 행동하시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당한 속박을 묘사하고 있는 출애굽기 3장을 보면, 그 답은 분명한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은 피압제자를 위하시고 압제자에게 대항하신다. 피압제자는 스스로를 해방하기에 무력하고, 압제자는 피압제자들을 비인간화시키는 자들이다.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도, 하나님은 분명히 힘없는 사람들-절름발이, 맹인, 병자, 여자, 그리고 아이들-을 위해 행동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사람들이 항상 힘없는 사람들은 아니다. 족장들, 사사들, 로마 백부장들,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그 외의 많은 사람들은 무력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의 동시대인들보다 훨씬 더 힘이 있었다. 그런데도 왜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행동하셨는가?
그 해답은 하나님의 다른 속성에서 발견된다. 즉 그분은 신실하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반응하는 사람들에게 호의적으로 행동하신다. 바울은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는 말로 이런 하나님의 속성을 멋지게 표현했다. 물론 성경에서 이 두 그룹-무력한 사람들과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종종 동일시된다. 그리고 예수께서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눅18:24, 마19:23, 막10:23)'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유력한 자들이 믿음이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부유한 자들은 자기 자신과 자기의 소유를 과신하기 쉬워서 하나님을 신뢰하기 어렵다. 부는 이런 어려움을 초래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극복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삭개오는 부자였지만 구원을 받았다.(눅19:1-10)
반면 힘없는 사람이라고 다 하나님께 마음이 열려있는 것은 아니다. 누가는 문둥병자들이 예수께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소리쳐서 치료를 받게 되는 과정을 설명했다. 열 명의 문둥병자가 치유되지만, 오직 한 명만이 돌아와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를 드렸다. 바로 그에게 예수께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17:19)고 말씀하셨다.
너무도 유명한 구스따보 구띠에레스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님의 보편애와 역사의 사닥다리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편애는 둘 다' 유지되어야 한다. 그는 "전자나 후자 중 어느 하나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기독교의 메시지를 불구로 만드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라틴 아메리카와 미국의 가톨릭 선언문에 많이 인용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은,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라는 명령의 적용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잘못된 해석이다.
(중략)
2. 미화와 자선으로는 해방하지 못한다
해방신학자들과 다른 사회개혁자들은 종종 가난한 사람들을 낭만시하는 함정에 빠진다. 니콜라스 베르쟈에프는 자신이 반쯤 마르크스주의자였던 때를 다음과 같이 빈정대며 회고했다.
"나는 그때 프롤레타리아가 계급의식을 가진 노동자 집단으로서, 착취는 당하지만 동시에 착취의 죄로부터는 자유로운 존재이며, 진리의 계시를 받기에 유리한 심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심리적 의식이 말하자면 초월적 의식과 일치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그 후 나는 젊은 시절의 이데올로기적 개념과 결별했다."
가난에 의해 더 높은 영성이 생겨나기 때문에 하나님이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선다는 생각은 물리칠 필요가 있다. 무력함 그 자체가 신성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문제는 복합적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종종 왜소하고, 시기심이 많고, 분노하기 잘하며, 도피 성향을 가진 존재로 묘사되지만, 이것은 자신들의 필요와 이익을 조직적으로, 또 일관성 있게 표출할 수 없는 상태에서 착취에 무기력하게 반응하는 방법이라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해방신학은 좋게 말하면, 가난한 사람들이 외부의 억압과 내부의 심리적 장애를 극복할 수 있도록 새로운 사고 모델과 행동을 지향하는 네트워크를 만들고 강화하려는 노력이었다. 그런 취지에서 구띠에레스와 보프 등의 해방신학자들은 성경에 나오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편애가 선의의 관심을 넘어서는 것임을 강조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성경의 편애는 하나님 자신의 본성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은 권력을 거부하시고, 이 세상의 권력 구조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는 모든 사람과 연대하여 스스로 그분의 아들 안에서 희생제물이 되신 분이다. 그분은 가난한 사람들을 동정하실 뿐 아니라 그들처럼 약해지신다. 사실 하나님은 사회를 역전시키신다. 아니 더 나아가 그분은 이 역전의 표현으로서 십자가에 매달리신다. 바울이 분명하게 표현했듯이, 하나님은 어리석음, 거치는 돌, 연약함으로 나타나실 뿐 아니라,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을 폐"하신다.(고전1:18-31)
하나님이 '권력을 거부하시고', '약해지신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분이 원래 약하다고 주장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그분의 연약함은 오히려 자기 백성과 하나가 되려는 그분의 의지와 관계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분은 아가페적 사랑의 본질을 보고 드리는 순전한 경배를 받기 원하시지, 두려움에서 나오는 잘못된 경배를 강요하는 속성을 보고 드리는 헛된 경배를 받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강력한 상징이 보여주듯이, 기적과 신비와 권위를 사용하라는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시고, 대신 진리와 선 안에서 그런 것들의 내적 정당성을 발견하는 믿음을 요청하신다.
예수께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요18:36)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런 의미에서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는 약탈적인 권세가 무고한 사람들을 공격하고 있으며, 그 권세는 무고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다른 권력에 의해 억제되고 견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는 말씀은, 진리와 선은 단순히 그 속성상 승리하게 되어 있으며, 어떤 외적인 것도 그것에 영향을 미칠 수 없음을 의미한다고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삶과 자유를 다른 사람들과 사회와 지배자들의 영적 상태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만들 수는 없다. 영적 상태가 낮거나 또는 은혜에 의해 충분히 계몽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는 경우에도, 개인의 권리는 안전하게 보호되어야 한다. 오로지 은혜에만 의존하기를 선택하여 법률을 거부하는 사회는 전제적인 사회가 되고 말 것이다. ... 인간의 삶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은혜로운 사회개혁을 기다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니콜라스 베르쟈에프>
그리스도인은 영적 세계의 시민으로서 은혜 아래에서 생활하며, 권력과 권위에 의해 제한받지 않는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그도 불가피하게 세속 세계의 시민이다. 여기서는 권력이 권력에 의해 견제받아야 하며, 은혜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정치적 수단이 사용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이 세상은 약속의 땅에 더 가까운 모습으로 바뀌어야 한다. [진정한 교회와 가난한 사람들(The True Church and the Poor)]이라는 책에서, 혼 소브리노(Jon Sobrino)는 교회에 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경험을 가지고 그 본질을 이해하고 또 그 범주를 도출하는 모임으로서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다. 그의 유력한 통찰은 의미심장하다. 분명히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가난하게 두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어쩌다가 베푸는 자선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또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이 피보호자로서 종교적인 온정주의자들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이등 국민으로 대우받도록 놔두는 것도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가난을 끝내기를 원하신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된 소식이다. 하지만 부자들은 이 복된 소식을 다르게 인식할 수 있다.
약속의 땅이란 억압의 원인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소브리노 같은 해방신학자들이 교회가 정치적인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죄와 구원에 사회적-집단적 차원이 있다면, 교회는 사회구조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때 교회는 결코 토지 소유권과 토지제도에 관한 법률과 관습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문명을 광야에서 약속의 땅으로 옮기려는 사람은 해방주의자이든 신학자이든, 다음과 같이 질문해보아야 한다. 어떻게 하면 바알의 토지관 위에서 형성된 빈곤을 타파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된 소식'이 될 것이다.
- 출처: <희년의 경제학: 땅 없는 사람들의 희망(From Wasteland to Promised Land)> 중 <제5장 광야에서 겪는 빈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 재론>에서 발췌, 로버트 안델슨-제임스 도오시 지음, 전강수 옮김, 대한기독교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