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짝 졸았다.
지루한 영화였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장가 같은 편안하고 꿈같은 영화였다는 이야기이다.
손을 잡지 않았지만 마치 손을 잡은 기분으로 강가를 거닐면서
여러 장면을 카메라에 담고 간혹은 서로를 찍어주었다.
열차의 침대칸에서 새우처럼 잠을 자다가 새벽녘에 눈을 떴을 때
그의 침낭이 내 위에 덮혀 있고 그는 새우처럼 잠을 자고 있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나는 연애를 시작했고
어느 때는 둘이, 또 어느 때는 당시의 남자친구와 셋이 만나 술을 마셨었다.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역량이 열정을 따라가지 못해 울고 울었던 (놀라운)때는
우직한 시민활동가의 에세이를 선물로 주었고,
우연히 내 사무실 부근을 지날 때는 귤색 가랑코에 화분을 손에 쥐어주고 돌아가기도 했었다.
3년만에 또 다시 연애에 실패했던 그 쯤,
그를 만나 술을 한 잔 하면서 목구멍까지 올라온 한 번만 안아줘, 를 참고 참았던 날,
그가 준 문화상품권으로 나는 '포옹' 이라는 책을 샀다.
그가 차를 샀다고 옆동네에 가서 커피를 마시기로 했던 날은 비가 내렸고 조금 서늘했다.
테이크아웃 커피를 하나씩 손에 쥐고 비가 내리는 차 안에서 그는
K가 누나에게 고백하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 관계가 조금 달랐을까 라고,
내가 누나한테 먼저 고백을 했다면 말이야 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너무나 여우처럼
왜지. 달라질 게 뭐가 있어, 라고 했고
그는 두어번 그렇구나, 를 반복했다.
사실 당시 나는 진심이었다.
그건 그에게, 그리고 그와 내가 공유한 그 장면에 설레지 않아서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 때의 감정이 애정인 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정도의 미숙한 사람이어서.
지금은 그는 누구의 남편이, 나도 누구의 아내가 되었다.
결혼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이미 그 전에 그도 나도 각자의 시시콜콜한 일상과 연애에 대한 조언들을 주고받고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몇개월씩 연락이 뜸해질 정도의 띄엄띄엄한 관계가 되었기에
그와의 관계가 아쉽거나 미련이 남는다거나 하는 것은 아닐뿐더러
그건 그 역시 마찬가지일거다.
그저 지금 나는 어제 영화의 여운이 남아서,
그냥 설레는 그 순간에 나의 감정에 좀 더 섬세하고 진짜 솔직했더라면,
그리고 그만큼의 용기가 있었더라면 정말로 어느 부분이 조금 달랐을까 하는 호기심과
마음이 소중한만큼 소중하게 여기지 못했던 오만한 내 옛 모습에 대한 반성.